야망없는 한국영화의 하향 평준화 : <관상> movie


포스팅 제목이 너무 극단적이어도 어쩔 수 없다. <관상>을 본 내 감상이 딱 그랬다.

한국 영화가 전체적으로 퀄리티가 좋아진 것은 사실이다. '한국 영화는 뭔가 좀 떨어진다'라는 편견이 없어진 것은 이미 오래되었고, 관객들의 신뢰도 두터워졌다. 오히려 외화의 설자리가 거의 없어졌다. 시즌 특수, 혹은 스타의 인기만을 믿고 왕왕 극장에 걸려있던 있었던 어이없는 퀄리티의 한국 영화는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즉 기본기도 없는 영화는 이제 거의 만들어지지 않거나, 배급 경쟁에서 도태되게 되어버렸다. 이것들은 매우 긍정적인 현상임에 틀림없다. 

한편으로는 영화라는게 대표적인 대중 매체인 것도 사실이다. 큰 돈을 들여서 큰 돈을 벌어들어야하며 좀 흥행했다 싶으면 기본 몇 백만명이 소비하게 되는 사이즈이기 때문에 당연히 기본적으로는 보수적인 노선을 택하는게 안정적이다. 영화는 예술이지만 예술이 아닌 것이, 잘만들어진 대중 영화는 치밀한 계산 없이 만들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치밀한 계산의 과정 자체가 오히려 예술일 만큼, 사실 영화는 과학에 가깝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관상>은 괜찮은 추석용 영화인 것은 맞다. 

이 영화가 재미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평은 약간 갈리는 것 같지만 <관상>의 이야기는 재미있는 편이다. 상당히 소재주의적으로 보이는 부분도 많지만 일단 수양대군 왕위 찬탈을 시대배경으로 택함으로써 굉장히 갈등이 센 드라마 구조가 자연스럽게 생기기 때문에 지루하거나 재미없지는 않다. 좀 더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재미없을 수는 없는 이야기다. 게다가 배우들의 면면이 너무나 화려하지 않은가.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너무나 미스캐스팅이라 느껴졌던 이종석을 제외하면 모든 배우들이 자기몫을 200% 해내고 있다. (주인공 송강호 캐릭터의 아쉬움은 사실 많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하고...) 덕분에 긴 러닝타임이지만 지루하지 않게 보았다. 

하지만 차라리 신인 감독의 작품이라면 이렇게까지 아쉽지는 않았을 것을, 이 영화의 감독이 한재림이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너무나 안타까웠고 한편으로는 절망스럽기까지 했다. 

<연애의 목적>과 <우아한 세계>를 만든 한재림 감독은, 내 기준에서는 상업적이면서도 자기만의 시각이 있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라 불릴 만한 몇 안되는 충무로 기대주 중 한 명이었다. 

<관상>은 한재림감독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니다. 이 작품은 시나리오 공모 당선작인데, 왜 당선이 되었는지는 사실 너무나 뻔하다. 위에 간단히 썼듯이 관상이라는 소재에 수양대군 왕위찬탈이라는 시대 배경... 재미있을 수 밖에 없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걸 한번만 뒤집으면, '누가 봐도 재미있는 이야기' '영화가 되는 이야기'라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해 기본기 이상의 연출력이 있는 감독이라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이야기라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그 동안 없었던 파격적인 멜로를 보여주었던, 식상한 조폭 영화와는 전혀 다른 조폭 이야기를 보여주었던 한재림 감독인 만큼 분명히 무언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말, 정-말 이 영화에서 나는 한재림을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관상이라는 소재도, 수양대군 시대라는 배경도, 그저 영화의 재미있는 스토리를 위해 소비되고 흩어져간다. 새로운 해석도 자기만의 시각도 없다. 물론 모든 영화에서 새로운 시각, 시도를 보여줬으면 하는게 과한 욕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재림 감독인데? 5년만의 신작인데? 기대가 컸다는게 죄라면 달게 받을 수 밖에. 

워낙 기존에 만들었던 작품들과는 스케일 자체가 다르고, 보다 본격적인 상업영화였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무난하고 평범한 영화였다. 기억에 남는, 눈에 띄는 대사나 장면이 하나도 없었다. 특히 초반의 몇몇 씬들은 심하게 툭툭 끊어졌고 코미디, 액션, 스릴러, 공포 등 다양한 분위기를 내는 장면들이 많았지만 전반적으로 연출이 너무 평이해서 무슨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이야기는 또 어떤가? 
다 보고 나서 가장먼저 든 생각.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이미 만들어진 얼굴을 '읽는' 관상가라는 주인공의 운명적 캐릭터 설정에, 수양대군이 왕위에 성공하고야 만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곁들여지자 주인공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패배감이 결말에 놓여지게 된다. 주인공이 항상 성공해야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므로 오히려 그 패배에서 쓰라린 정말 인간 본연의 비극성에 닿는 어떤 무게나 깊이가 느껴지면 좋으련만 억지로 그렇게 보려고 보려고 노력해도 안된다. 오히려 답답하고 참 허무하기만 했다. 

뒤늦게 덧붙여지는 몇 줄의 자막으로 그래도 권선징악이구나 라는 것을 억지로 느끼게는 되지만, 결국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말이다. 잃은 것만 한가득이니... 이쯤되면 수양대군 시대를 배경으로 그린게 오히려 독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얼굴에 드러난 운명을 읽는 '관상가'의 아들이 '운명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가진' 캐릭터라는 구조는 상당히 좋게 느껴졌기에 그런 면에서 어떤 메시지를 전해주리라 기대했는데 그 아들이라는 녀석의 결말이 참 웬... 뭔.... (...) 그 결말로 아이러니와 비극성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가? 

<광해>를 봤을 때도 참 마뜩찮은 부분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 영화는 '좋은 지도자란 무엇인가'라는 한 가지 명확한 나름의 화두를 가지고 있었고 다소 얼렁뚱땅이긴 했어도 관객들이 원하는 결말을 보여줌으로써 카타르시스를 확실히 주었다고 생각이 드는데 <관상>은 화두도 결말도 훨씬 더 모호하다.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시피 <관상>의 세팅이 '영화가 되는 이야기'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겠다. '영화가 되는 이야기'에 분명한 갈등 구조, 분명한 클라이맥스, 몇 가지 장치들..... 그런데 이것만으로, 정말 좋은 영화가 되는가?  <관상>은 이에 대한 답을 주는 영화라고 감히 말한다. 위의 나열한 것들은 좋은 영화가 되기 위한 충분 조건인 것은 맞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절대 될 수 없다. 

최동훈의 <도둑들>을 봤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나 좋아하는 자기만의 스타일이 뚜렷하던 감독이 범작을 내놓았을 때, 그리고 그 범작이 엄청난 흥행을 했을 때. 마음은 네 배로 더 복잡해진다. <전우치>는 <도둑들>에 비해 흥행도 안됐고 반응도 안좋았지만 분명히 그 만의 어떤 뚝심과 의도들이 보였기에 팬으로써 정말 재미있게 의미있게 본 작품이었는데 <도둑들>은 '나의 최동훈은 이렇지 않아'를 절로 외치게 하는 영화였다.. 라고 한 영화팬이 구석에서 찌질대봤자 천 만이 넘었으니 이를 어쩌리.

봉준호의 <설국열차>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사실 어느 정도 비슷한 실망감이 살짝 있었는데, <관상>을 보고 나니 봉준호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관상>은 기본 이상은 되는 영화이다. 하지만 딱 그 선에서 멈추기에, 너무나 큰 아쉬움이 남는다. 그 이상을 이미 보여주었던, 충분히 보여줄 거라고 기대할 수 있는 감독이 아닌가 말이다. <관상>에는 아무런 영화적인 야망이 느껴지지 않는다. 굳이 찾자면 추석 대목에 흥행을 해보자라는 야망은 느껴지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가문의 영광>시리즈에도 그 정도 야망은 있다. 차이가 있다면 <관상>은 치밀한 계산 아래 잘만들었다는 것 뿐이다. 

<도둑들>과 <광해>가 흥행했던 작년, TV의 한 영화 평론 프로그램에서 약 10년전의 분위기와 비교하면 지금의 한국영화는 너무나 안전하고 무난하게 가고 있다...라고 평했다. 2003년에 <올드보이>와 <지구를 지켜라>가 공개되었다. <범죄의 재구성> 개봉이 2004년, <연애의 목적>이 개봉한 것도 2005년이다. 

10년 남짓한 시간동안 무엇이 우리 시대의 가장 흥미롭고 독특하던 영화 감독들을 이렇게 무난하게 만들었을까? 
내 부족한 식견을 바탕으로 내릴 수 있는 답은 딱 하나, 한국 영화판이 너무 세련되지고, 너무 산업화, 시스템화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산업화 시스템화의 극점인 헐리웃과 함께 작가 영화들을 포함하는 인디시장이 같이 가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영화들을 볼 수 있지만 인디가 오히려 점점 더 설자리가 없어지는 우리나라 환경에서 2000년대 초반 같은 한국 영화들을 또 다시 볼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당분간 허망한 꿈이 될 것만 같은 확신이 들었다. 그 확신을 내려준 것이 이 감독님의 이 영화다. 

기본도 안되는 한국영화가 없어진 시대가 된 만큼, 새롭고 독특한 한국영화 역시 보기 어려워졌다. 슬픈 한국영화의 하향평준화의 현실. 

추석날, 매진을 비집고 겨우 앉은 영화관에서 영화 한편 재미있게 잘 보고 나와서 느껴지는 것이 그저 절망감 뿐이라니 입안이 너무나 썼다. 허한맘을 달래고자 마침 <우리 선희>도 보았지만.... 그에 대한 얘기는 조만간. 

2013. 9. 19 
1막 - 주인공 산골에 숨어살다가 한양으로. 
2막 - 자신의 관상가로서의 재능 펼치게 됨.. 김종서와 함께 일하게 되고 왕과도 일하게 된다... 그러나 왕이 죽으며 수양대군의 반역이 코앞으로 다가오고... 막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기회에서 결국 일이 그르쳐지고..
3막 -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성공.. 아들도 잃고... 다시 돌아옴... 

덧글

  • 구만리 2013/09/21 17:10 # 삭제 답글

    "한국 영화판이 너무 세련되지고, 너무 산업화, 시스템화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

    이 말씀에 동의합니다만, 저도 부족하지만 하나 더 붙이고 싶은 건, 그 산업화와 시스템화된 원인이 자발적(?)이라기 보다는 몇 개 큰 회사의 '나름 과학적인' 행보 때문인 것도 있을 것 같습니다.

    경제개발하듯이 외국의 사례, 그 중에 미국의 큰 영화들의 사례들을 가지고 와서 그 흥행요인을 분석하고 배급력을 바탕으로 한 힘으로 시나리오 선택에서부터 제작까지 밀어부쳤다는 거지요.

    전체 제작 시스템은 여전히 후진적인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몇몇 탁월한 재능을 가진 개인들이 평균을 끌어올려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아, 너무 막연하게 말한 것 같습니다만..)
  • leo 2013/09/21 23:09 #

    안녕하세요. 예, 아무래도 제가 말씀드리고 싶었던 부분은 '세련'보다 '산업화', '시스템화'라는 부분인것 같습니다. 제작 자체는 후진적인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이겠지만... 개발, 투자 단계만큼은 꽤 많이 시스템화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까지 평준화된 영화들을 보니 점점 그런생각이 드네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영화 표를 사는것이 반은 도박같은 기분이었는데, 리스크는 많이 준 대신 영화 보는 재미가 많이 줄었습니다. 아쉬워요. 가끔씩 튀어나오는 한국영화 괴작(?)들을 보는 것도 꽤 재미가 쏠쏠한 일이었는데, 앞으론 그런 영화를 더 보기 힘들겠지요. 덧글 감사드립니다.
  • 조현수 2013/09/21 20:33 # 답글

    계유정난을 다룬 영화라기 보다는, 계유정난에 휩쓸린 몰락한 가문이 재기의 기회를 놓치고 개박살 나는 이야기를 다룬 얘기로 봐야죠..누가 이길지 이미 아는 이야기라서 긴장감이 좀 덜하긴 했지만, 또 감독의 몰개성이 분명 아쉽긴 했지만 배우들 연기 보는 재미는 확실했던 것 같습니다ㅋ송강호와 조정석의 케미컬이 돋보였던 영화..
  • leo 2013/09/21 23:14 #

    안녕하세요. 배우들 연기 보는 재미가 있었다는 부분엔 무척 공감합니다. 요즘엔 '믿고 보는 하정우'라는 말들을 하시지만, 저에겐 역시 아직까진 '믿고 보는 송강호'...더군요. 조정석은 정말 매력을 마구 발산하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기능적으로 들어간 캐릭터라는 느낌이 너무 들어서, 필요한 구다리에만 쓰고 버려지고 쓰고 버려지고가 반복되는듯한 것이 좀 아쉬웠습니다. 아무튼 두 배우분 합이 참 좋더군요. 이정재도 정말 좋았습니다.
  • 포스21 2013/09/21 21:05 # 답글

    세련되고 산업화된것은 맞는데 ,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정말로 상업영화답게 가려면 스토리를 뜯어고쳐서
    대체역사로 가더라도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만들었어야죠. 부모님 모시고 추석극장가를 찾았는데
    왠 학살엔딩... 역사를 배경으로 한것이니 이해할 순 있지만 이럴거면 차라리 헐리웃 영화를 보겠습니다.
  • leo 2013/09/21 23:17 #

    안녕하세요. 아, 정말 공감합니다. 저도 어머니 모시고 갔는데.... 다소 불필요하다 느껴졌던 몇몇 잔인한 묘사들, 다크하면서도 허무한 오묘한 엔딩에 조금 당황스러웠습니다. 여기서는 눈물을 흘리라는 건가 신파 부성애 코드인가... 혼란이 오더군요. ㅜㅜ 절대 한국 관객들이 좋아할 엔딩이 아닌데... <광해>의 영리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 kanasi 2013/09/23 16:25 # 답글

    많이 공감합니다
    자본의 힘이 점점 세지는 것 같습니다
  • leo 2013/09/23 23:44 #

    안녕하세요. 공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정말 그런것 같습니다. 한국 영화가 쭉 호황이라고는 하지만 작가 감독들의 입지는 사실상 무척 좁아지고 있고, 계속 이렇게 가다간 판 전체가 매너리즘에 빠질 것 같습니다. 이미 그 전조가 시작된것 같고요... ㅜㅜ 거창한듯 얘기했지만 그저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싶은 영화팬으로서 참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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